성찬을 기다리며

• Here I stand

오늘은 종교개혁 50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사람마다 생일 태어난 날이 있고,

교회마다 창립기념주일 설립된 날이 있듯, 전 세계 개신교 교회들이 시작된

날입니다. 로마 성지순례를 가면 성 베드로 성당이라는 엄청난 건축물이 있지

요. 5백여 년 전, 그 성당 신축 비용이 모자라자, 교황 레오 10세는 재물을

봉헌한 사람은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면벌부(免罰符, Indulgentia)를 판매했습

니다. 면벌부를 사면 살아 있는 사람은 물론이요, 죽어 연옥에서 벌을 받고 있

는 영혼까지도 천국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 면죄부 판매 일행이 독일 동부

비텐베르크에 왔을 때, 그곳의 신부 마틴 루터는 성당 정문 게시판에 95개 조

항의 개혁문을 붙였습니다. 주로 면벌부에 대한 반대를 골자로 하고 있는데요,

이것이 불씨가 되어 유럽을 뒤흔드는 종교개혁의 횃불이 타올랐습니다. 그날

이 1517년 10월 31일, 교회개혁의 시작이요 우리 개신교의 시작이 됩니다.

500년을 훌쩍 넘어 2021년을 사는 이 시대, 당시 부패했던 로마 가톨릭에 목

숨을 걸고 개혁을 외쳤던 마틴 루터가 살아온다면? 아니, 2천 년 전 저 타락

한 예루살렘 성전 바리새인 제사장들을 향해 진노의 채찍을 휘두르신 예수님

께서 이 시대에 오신다면,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세속주의, 물신주의, 혼합주의에 빠진 한국교회에 대하여도 질책하지 않으실

까?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지 못하고 맛을 잃어 발에 밟히는 소금이 되었다

고 탄식하지 않으실까? 무엇보다 이 코로나 시대 영적인 나태와 게으름에 빠

져 있는 우리를 향해 ‘너희가 한 시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더냐’ 탄식

하지 않으실까?

‘Here I stand’. 이렇게 시작되는 신앙고백문이 있습니다. 루터가 1521년 보

름스 국회 신성로마제국 황제 앞에서 목숨을 걸고 담대히 남긴 말입니다.

”Here I stand... 여기 나는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우리는 이런 개혁가들의 정기를 이어받은 개신교 성도입니다.

• 말씀으로 돌아가라

종교개혁 3대 원리(슬로건)가 있어요. 다섯 가지이지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개신교 성도라면 늘 새겨야 할 진리이

지요. 그 가운데 모든 원리의 기초가 되는 것은 ‘오직 성경’입니다. 오직 성경

으로! 성경에서 ‘오직 은혜’ 은혜가 나오고, 성경에서 ‘오직 믿음’ 믿음이 주어

지니,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에서 시작하자. 성경만이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개혁은 ‘ad fontes’ 근본으로 돌아가는 일인데, 성경 말씀으로 돌아갈

때 개혁이 시작됩니다.

그래서입니다. 개신교는 오직 성경, 말씀을 중시해요. 그것이 예배에서 나타납

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예배가 다르지요. 가톨릭은 굉장히 엄숙하고 예식들이

많아요. 말씀보다는 성찬 중심이에요. 미사 때마다 성찬식을 행합니다. 예배,

미사는 곧 성찬이지요.

그런데 개신교는 다른 순서들 보다 말씀 선포를 중시해요. 종교개혁은 예배의

회복, 말씀의 회복 운동입니다. 우리 예배의 반은 설교입니다. 성당은 강단 중

앙에 성찬대가 있다면, 교회는 강단 중앙에 설교단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성

찬식은 축소되었지요.

• 성찬, 손으로 만지는 말씀

그런데 저는 개신교 목사이지만 성찬을 중시합니다. 성찬은 주께서 가르쳐 주

신 유일한 의식입니다. 이것을 행할 때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

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6:56).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이라 해요. 그리스도께서 주의 영으로 성찬

의 떡과 잔에 임재하십니다. 설교시간 말씀을 통해 주께서 임재하신다면, 성찬

식 떡과 잔을 통해서 또한 임재하십니다.

루터교회는 이렇게 말해요. “설교가 ‘1대 다수’라면, 성찬은 ‘1대 일’ 형식이

라. 설교가 ‘우리를 위한’(Christus pro nobis) 하나님 말씀이라면, 성찬은

‘나를 위한’(Christus pro me) 하나님 말씀이라, 설교가 ‘보이지 않는 말씀’이

라면 성찬은 ‘보이는 말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말씀이라”.

그러므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중요한 통로 중에 하나입니

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 이 떡을 떼는 성찬입니

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이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는 떡을 떼는 성찬을 행

했습니다(행2:42).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느끼고 구원의 감격을

경험했습니다. 길고 긴 기독교 교회 역사 동안 성찬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이 없었다면 이 전통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 성찬을 기다리며

문제는 코로나 19로 인해 작년부터 올해에도 성찬예식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는 온라인 가정 성찬식, 주차장 드라이브 스루 성찬식,

일회용품 성찬식 등을 한다 하지만 저는 내키지 않았어요. 혹 거룩함이 깨질

까봐, 주님의 몸과 피를 받는 것인데 형식적이 될까 조심스러워서. 무엇보다

성찬은 communion, 함께 모여 떡과 잔을 나눔으로 한 신앙공동체임을 경험

하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코로나 19에서 자유케 된다면 가장 먼

저 성찬예식을 거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오늘 강단에 떡과 잔까지 진설해 놓았는데 성찬식을 하는 거

에요 마는 것에요?”

예 행하지 않습니다. 다만 너무 오래 성찬을 받지 못해서, 성찬을 눈으로라도

보며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강단에 성찬식 떡과 잔을 진설해 놓고 예배드립니

다. 주님의 떡과 잔을 앞에 두고, 오늘도 그 성찬을 나누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며, 온 교우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그 날을 소망 가운데 바라봅니다.

‘성찬을 기다리며’.

/사랑으로 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