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날 풍경

명절 쇠고 돌아오는 길, 늘 그렇듯 마음 한 구석 푼푼함과 허전함이 함께

밀려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부모님 형님네들, 서로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

아내다 만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새식구가 들어 왔어요. 지난봄

에 결혼한 큰 조카가 색시와 함께 인사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영민이 이후

새멤버?는 처음이네요. ‘작은 아버지~’ 하며 예쁜 조카 며느리가 인사를 하

는데 어색해서 혼났습니다. 제가 벌써 조카며느리를 보고, 세월이 가긴 가나

봅니다. 이제 총 열 여섯 식구, 아버지 어머니 흐뭇해하시는 모습이 감사였

습니다.

지난 번 보다 더 야위신 부모님, 특히 어머님은 거동하기 불편해 보일 정도

까지 되셨습니다. 오죽하면 명절날 잠시 안방에 누우셨어요. 아무리 힘들어

도 멀리서 온 막내아들 걱정할까봐 이런 적은 없으셨는데.

제가 아프신 허리를 한참이나 주물러 드렸습니다. 예전 같으면 두세 번만

안마하면, 됐다고 다낫다고, 아들 힘들라 금방 손사래를 치셨는데, 이번에는

‘그만해라 다 나았다’ 하시면서도 그냥 가만히 엎드려 계십니다.

“엄마, 내가 허리엔 도사잖아요. 만지면 금방 나아요”

아닌 게 아니라 정성을 다해 만졌더니 씻은 듯이 나았다고 일어서십니다.

근데 웬걸요. 몸을 추스르시더니 다시 주방에 가서 자꾸 간섭하십니다. 손주

며느리까지 왔으니 앉아 계시라 다들 성화인데도, 아직은 손을 못놓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수런대다 제 각각 집으로 돌아가면, 텅 빈 자리

또 얼마나 허전하실까요.

• 우시는 아버지

고모님이 계셔요. 다섯 분 고모님들 다 돌아가시고 막내 고모님 한 분만 살

아 계십니다. 명절 날 아버지 엄니, 형님들과 함께 고모님 댁에 갔습니다.

아흔이 다 되신 고모님. 일 년 만에 뵙는데 많이 쇠약해 지셨습니다. 시력은

거의 잃으셨고 혼자 거동하기도 불편하십니다. 치매 끼도 조금 있으셔서 모

시고 사는 사촌 형님이 많이 힘드십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업어 키우다시피 하셨대요, 그래서인지 아버지께서

고모님께 대한 마음이 남다르십니다. 이제는 세상 소망은 다 끊어져서 하나

님께서 부르실 때만을 기다리시는 고모님. 그런 누님을 바라보시는 아버지

마음은 또 어떠실까? 고모님 옆에서 그 손을 꼭 잡고 계시는 엄마 모습이,

마치 고향집 친정 엄니 옆에 딸처럼 보였습니다. 어르신들 모두 신실한 믿

음들이셔서 대화 마디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천국의 소망을 말씀하심이 은

혜였습니다.

음식이 나오자 큰 형님이 대표로 기도하십니다. 기도하는 중에 옆에서 부스

럭 소리가 나요. 아버지 쪽인데 주머니에서 무얼 꺼내십니다. 손수건. 내 그

럴 줄 알았습니다. 벌써부터 눈이 발가셨습니다. 큰 아들 기도 내내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누님, 몸 건강 하셔. 내년 명절에 올게요.”

팔순의 동생이 구순의 누님께 인사를 드리며 헤어지는 시골 집 마당, 가을

햇볕이 참 따스하게 내리쬐었습니다.

• 참 소박한 벌칙

딸은 딸이에요. 돌아오는 차안에서 둘째 예은이가 아빠 마음이 무거운 걸

보고는 호들갑을 떱니다.

“아빠, 나 청주에서 할아버지랑 이야기 많이 했다”

“언제?”

“응, 할아버지 혼자 안방에 계실 때 친구 되어 드렸어요. 딸이 최고지?”

“그래 정말 최고다. 플러스 백점(개콘 버전)”

“근데 할아버지한테 재미난 이야기 들었어요”

“뭔데?”

“할아버지께 여쭤 봤어. 평소에는 할머니랑 뭐하시냐고. 그게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뭐하신대?”

“청소도 하시고 운동도 가시고... 그리고 윷놀이도 하신대”

“윷놀이? 두 분이서?”

“응, 근데 윷놀이 벌칙이 뭔지 알아요?”

“뭔데?”

“히히. 찬송가 불러 주는 거래”

“뭐?”

“윷놀이해서 진 분이 이긴 분 앞에서 찬송가 불러 드린대. 찬송가 한 절”

“그래? 하하하”

차 안에서 모두가 빵터졌습니다. 찬송가 불러주는 벌칙이라. 그러니까 노 장

로 권사가 윷놀이를 하고는, 진 사람이 일어나 손을 모으고 찬송가를 부릅

니다. 또 한 분은 앉아서 가만히 듣고 계시고. 그 모습을 한참 생각하며 웃

다가 코끝이 시큰해집니다.

<윷놀이>

팔순의 두 노인네가 윷을 던진다.

젊은 날의 그 뜨거웠던 시절을 뒤로 하고

우렁이 어미처럼 자식 위해 다 주시고 껍데기만 남은 몸

기력은 쇠해 구부정해진 등, 앙상한 어깨를 서로 기대고

해는 너울너울 져서 일찍 밥상 물린 저녁 무렵에

그 흔한 화투장 한 번 만져 본 적 없는 노부부가

윷을 던진다.

기를 쓰고 이길 것 없으니, 모가 나오면 어떻고 도가 나오면 어떠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가 서로를 따르는 말판조차

부창부수(夫唱婦隨)하며 그렇게 함께 살아 오신 두 분을 닮았다.

그리고는, 진 사람이 그 벌로 부르는 찬송

그게 어디 벌이랴 서로를 향한 축복이다

엄마는, “주날개밑 내가 편안히 쉬네”를 부르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찬송을 부르고 그 찬송을 들으며 깊어가는 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또 있으랴

그 가난하고 소박한 마굿간에

주님 오셨으리라 천국이 임했으리라

건강하세요. 두 분. 고향에 전화 드리면 “응 애비냐” “우리 애기 목사님” 하

시는 그 음성 오래오래 들을 수 있도록요. 그리고 언제 그 윷놀이에 저도

끼어 주세요. 벌칙으로 어릴 때 두 손 두 발 모으고 두 분 앞에서 부른 ‘보

밭’ 노래 다시 부르겠습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살아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이 소박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5:3)

/사랑으로 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