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들판에 서서

• 추억이 서린 겨울들판

정신없이 대림과 성탄을 보내고,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한 해의 끄트머

리에 와 있습니다. 무연한 마음에 밖으로 나섰더니 날이 얼마나 차가운지 귓

불이 빨개지고 코끝이 시려 옵니다. 원주천변을 따라 걷다 어느새 관설동 들

판에 올라서니, 저 멀리 시루봉 꼭대기까지 텅 빈 무채색 겨울이 내려와 앉

아 있었습니다.

하얀 이불 홑청을 펴놓은 듯 요 며칠 내린 눈이 쌓여 있고, 바람에 서걱서

걱 흔들리는 갈대들, 먹이를 찾는 새들은 이리저리 들판을 몰려다닙니다. 봄

여름 가을 그 부산하고 풍성했던 날들을 뒤로하고 밑둥잘린 벼 그루터기들

이 패잔병처럼 줄 지어 있고, 논둑에 내동댕이쳐진 허수아비만이 빈들을 지

키고 있습니다. 고향에 늙으신 엄니같이 순한 미소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노

을을 뒤로 하니, 저기 어디쯤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날 것만 같았습니다.

가끔 마음이 허허로울 때 겨울들판을 찾습니다. 서로 같은 마음일까요? 가

난한 마음이 가난한 땅을 만나 편안해 지는 느낌. 그리고 아마도 어릴 적 향

수 때문일 것입니다.

그 옛날 겨울들판은 유년의 놀이터였지요. 지금이야 TV에 핸폰까지 손에 쥐

어 있으니 추운 날 구태여 몸을 떨어가며 밖에 나갈 이유가 없지만, 그때는

산과 들판을 오가며 쏘다녔지요.

문 열면 바로 이어져 있던 논두렁 밭두렁. 밤새 눈이 내리면 일찍 일어나

뽀드득 소리내며 처음 발자국을 찍고, 언 들판에 쌓아 놓은 포근한 볏단은

술래잡기를 비롯해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개중에 좀 평평한 들녘을 골라 동네 악동들은 축구를 하고, 고맙게도 물을

대놓은 곳은 썰매타기에 안성맞춤이었지요. Y자 나무를 잘라 새총을 만들고,

볏단 속에 꿩을 잡는다고 수도 없이 덮쳤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습니

다. 공기총을 가지고 있는 동네 아저씨를 따라 시커먼 산으로 사냥을 나섰다

가, 칡뿌리만 캐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가끔 논둑을 태우기도 하고 짚단들

과 잔솔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며 몸을 녹이기도 했지요. 정월 초하룻날 ‘개부

려찌부려’를 외치다 하늘높이 던진 불깡통은, 그 들판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

았습니다.

줄 세 개 그어진 파란 추리닝에, 새카매진 코에는 콧물이 줄줄 흐르고, 사타

구니에 찔러 녹이던 고사리 손. 날이 좀 푹하면 신발아래 질척거리며 달라

붙은 흙은 왜 그리 무거운지, 앞으로 맞을 인생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

도 모른 채 그저 신나게 지치며 뛰놀았습니다.

 • 생명이 숨 쉬는 땅

그러나 겨울들판은 황량하고 쓸쓸함만 있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가서 메마

른 풀숲을 헤치면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생명체들로 가득합니다. 푸른빛을

잃지 않고 살아있는 자그마한 초목들, 꼬물꼬물 벌레들과 세상에 나올 날을

기다리는 그 알들까지, 서로 몸을 비벼대면서 살아 내고 있는 고만고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얼어붙은 땅이지만 그 품 안에서 시린 날을 뒤척

이며 의연하게 겨울들판을 건너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앙상한 겨울나무

몸속에서 연초록 새순이 자라고 있듯이.

그러니 겨울들판은 죽어 있는 땅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비어낸

곳이요 쉼이 있는 곳입니다. 풍요로움은 때로 가득 채운 곳이 아니라 비어있

는 곳에 존재하는 법. 죽은 듯 보이지만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자궁처럼, 그

깊숙한 곳에 찬란한 봄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지요. 찬겨울인지라 햇살의 보

살핌이 여려졌지만 들판의 생명들은 그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때가

되면 저 시루봉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에 깨어날 것입니다. 힘차게 싹을 틔우

며 생명의 땅으로 나올 것입니다.

<겨울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 겨울들판에 서 보라

인생에도 겨울들판이 있습니다. 찬란한 봄도, 무성한 여름, 풍성한 가을도

아닌 홀로 힘겹게 건너야 할 차디찬 겨울들판 말입니다.

저 또한 살면서 겨울들판을 여러 번 건넜습니다. 내 영혼 갈 길을 잃어 찬

서리 내리는 그 들녘을 헤매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겨울들녘을

지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그 곳은 결코 외롭지 않았습니다. 쓸쓸하고 황량했지만

생명과 소망의 들녘이었습니다. 그 들판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신 분이 계셨

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아니 그 겨울들판 자체가 주님이셨습니

다. 그 주님께서 품에 포근히 안아 주셔서 그 들판을 건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두 팔을 벌리고 ‘훠이’하며 큰 소리를 쳐 보았습니다. 목도리를 벗어

던지고 어릴 때처럼 마구 달려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가만히 겨울들판

이 다독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숨 가빴던 한 해를 내려놓고 처연

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들판, 바람도 수고했다며 잠시 쉬어 가는 곳. 바쁘게

조이던 삶의 고삐를 잠시 풀어놓고, 시리게 불어오는 바람 속으로 속삭이시

는 주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 최목사! 올 한 해 또 수고했다. 힘든 때 많았지. 그래 안다. 내 그 마

음 안다. 잠시 내 품에서 쉬어라.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꾸나”

발자국은 뒤에 남겨 두는 법.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남으면 남는 대로, 한 해

를 내맡기고 또 한 해를 소망가운데 바라보며, 그저 푸근한 주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 원합니다.

새로운 길을 내야 하는 12월 마지막 주일, 겨울들판에 나가 볼 일입니다.
/사랑으로 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