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짐에 대하여

    
• 느림의 미학

큰 착각인지 몰라도 아직은 제가 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흔적

들을 보면 ‘나이가 들어가고 있구나’ 확인하게 되지요. 아이들이 점점 커서

동생이 형의 학년이 될 때, 머리에 희긋희긋 흰머리가 늘어날 때, 계절이 바

뀌어 여름성경학교가 다시 돌아올 때, 그런데 무엇보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

거가 있으니, 마음이 좀 느긋해진 것입니다. 여유롭게 반응한다, 좀 느리게

산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젊을 때는 조급하고 예민하게 반응했을 터이지

만, 이제는 한 발짝 물러섭니다. 성격도 좀 바뀌고, 목회하는 방식도, 대인관

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왜일까? 지나고 나면, ‘그렇게 잠 못 이룰 일도 아니었는데’ 하며 후회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지요.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좀 더 유연해 진 것은 아닌

가? 요즘 흔히 말하는 ‘느림의 미학’이라 이름 붙여 봅니다. 몸이 나이 먹어

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느긋한 방향으로 적응해 가는 현상인 것입니

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 무뎌져서는 안 될 것들

그런데 문제는 ‘무뎌짐’입니다. 그 느림이, 나이듦이 무뎌짐으로 가면 안되

겠지요. 병사가 창끝이 무뎌졌다면, 목수의 톱날이 무뎌졌다면, 주방의 칼끝

이 무뎌졌다면. 감별사의 혀끝이 무뎌졌다면.

예. 무뎌져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느긋해서도, 익

숙해져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세월 더할수록 더 민감해야 하고 단호해야

합니다. 뭘까요? 신앙의 주제들, 영적인 것들입니다. 처음 주님을 만난 첫사

랑에의 무뎌짐, 주의 성전에 오르는 설렘이 무뎌지고, 흔하디 흔한 찬송을

부르면서도 눈물이 흘렀는데, 주를 만난 기쁨의 간증은 언제인지 아련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거룩한 양심이 무뎌졌습니다. 무엇보다

감사가 무뎌졌습니다. 주신 것이 많지만, 받은 은혜에 점점 감사가 사라졌

습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지옥의 단편>은, 예수님께서

은혜를 베푼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상상한 소설입니다.

주께서 길을 가시다가 주정꾼을 만납니다. 그는 폐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걷지 못하던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

닌들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입니까? 그 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후 세상을 비관하다 이 꼴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님은 창녀를 만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였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느냐?” 창녀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당신

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습니다.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 수가 없었기 때

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세상사람 누구도 내 진실을 믿어주

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님은 불량자가 사람들과 난폭하게 싸우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십니다. “여보게.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불량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겁니까? 보이는 것

이 모두 신경을 돋우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입니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

고, 마구 치고 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차라리 세상을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모두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

고 있었습니다.

    
• 날카롭게 하라

오늘은 6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어느새 2018년 상반기 6개월을 다 보낸 것

이지요. 오후예배는 상반기 구역사역을 마무리 하면서 구역연합예배로 드립

니다. 다음 주일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무슨 특별한 행사를 하지는 않습니

다. 다만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는데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

나온 6개월을 감사로 돌아보고 하반기 6개월을 힘차게 맞이하고자 합니다.

혹 감사가 무뎌진 것은 아닙니까? 세월 더하면서 건강, 연금, 자존심, 내 자

리에는 예민해 졌는데 거룩, 긍휼, 죄, 관계, 침묵, 순종, 양심 등 신앙의 덕

목에는 무뎌진 것은 아닙니까?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다윗의 물맷돌, 홍해를

가른 모세의 지팡이, 말씀을 받아 적었던 바룩의 서재, 다니엘의 기도 골방,

마케도냐로 향하는 바울의 선교배, 인류를 구원하신 골고다 주님의 십자가,

이 모두 무뎌진 영혼을 깨우는 예리한 비수들입니다.

내게 무뎌진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반년을 내다보며 다시 철 연장을 날카

롭게 할 때입니다.

/사랑으로 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