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 한 알의 세월

8월의 마지막 뙤약볕이 뜨겁습니다. 교회 뒤뜰 사택 옆으로는 뜨거운 태양

아래 빨간 고추들이 일광욕을 하듯 줄지어 누워서 또 다시 익어가고 있습니

다. 그 옆으로 미스바는 제 아지트입니다. 목양실에서 일을 하다 쉴 요량이

면 그 곳에 갑니다. 아무도 없어 한가하고, 무엇보다 한 여름에도 그늘이 져

서 시원합니다. 포도나무가 하늘을 가려 주기 때문이지요. 몇 해 전에 넝쿨

삼아 몇몇 나무를 심었는데, 다 죽고 마지막에 이 포도나무가 살아서 그늘

막이 된 것이지요. 해마다 이때가 되면 시커먼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

려 있습니다. 주인이 따로 없으니 오가는 길손들이 와서 따먹기도 하고, 새

나 벌레들의 요깃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어제는 나가 봤더니 대부분 따먹고

남아 있는 것이라곤 철망 바깥쪽이어서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괜한 욕

심으로 철망 너머로 손가락을 넣어 몇 알을 따서 먹어 보았습니다. 아, 얼마

나 달고 맛있는지요. 어릴 때 포도밭에서 따먹던 바로 그 맛이었습니다. 맛

뿐이 아니에요. 가만히 포도 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탱글탱글 탐스

럽고 또 향기가 좋은지요. 튼실한 송이는 어디 상품으로 내놔도 손색이 없

을 것 같았습니다. 거름을 주거나 가꾼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이리 멋진 열

매를 맺었을까요?

    
가만히, 이렇게 한 알의 포도가 영글기까지 있었던 세월들을 떠올려 봅니다.

나무는 지난겨울 엄동설한의 추위를 잘 견디어 낸 것입니다. 따스한 봄이

되자 화려하지 않은 수수한 포도꽃을 피우고야 말았습니다. 올 오뉴월에는

또 얼마나 가물었어요? 삼복더위 뙤약볕은 또 어떻게 견디었을까요? 폭우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쳤던 때도 있었습니다. 몇 번의 태풍도 지나갔지요. 이제

앞으로도 가을 찬 서리와 마지막 따가운 햇볕을 참아 낸다면 극상품 포도를

맺게 될 것입니다. 미당의 <국화 옆에서>가 떠오릅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국화 한 송이, 포도 한 알이 만들어지는데도 세월이 있

고 과정이 있었습니다. 겪어야 할 것은 겪어야 하고, 지나야 할 것은 지나야

했습니다. 따스한 봄날이든 차디찬 겨울 칼바람이든,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감내해 내야지만 꽃이 피고 여물어서 끝내 아름다

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 순금이 되기 위하여

세상도 마찬가지이라. 고통을 잘 견뎌야 순금이 됩니다. 용광로 불을 통과하

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서야 순금이 됩니다. 1,000도의 용광로를 세 개, 총

3,000도 이상의 용광로를 거쳐야 합니다. 이 제련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

면 정품이 될 수 없습니다. 동광석 50t을 제련해야 겨우 1㎏바의 금괴가 나

온다지요. 휴대전화보다 조금 더 큰 크기입니다. 진짜와 가짜는 연단 이후에

가려집니다. 순금은 불로 단련한 후에 나타납니다.

입학하기 싫은 학교가 있습니다. 고난학교. 그러나 인생에 가장 훌륭한 학교

입니다. 제련소 용광로는 ‘순금’을 만들지만, 예수님 용광로는 ‘정금’을 만듭

니다. 정금같은 신앙이라.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빛나는 걸작품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풍파 앞에 쓰

러지지 말고 굳세게 서십시오. 힘들 때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십시

오. 시편 기자가 고백합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

    
• 고난을 통해 증명하라

요즘 새벽마다 욥기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그의 이 고백은 욥기서의 백미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 8∼10).

    
욥은 순금이 되는 과정이 인생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손에 순금을

쥐는 것이 복인 줄 알았습니다. 거기에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과정을 통해 내가 순금이 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내 손에 순금’이

아니라 ‘내가 순금’이 되는 것이라. 그래서 욥은 고난을 끝으로 보지 않았습

니다. 내가 순금이 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경험'만 하는

사람이 있고 '증명'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요. 고난을 당하여 그 고난에 짓

눌리고 쓰러지는 사람은 '경험'에 그치는 사람입니다. 반면, 고난을 당하여

연단되어 믿음의 빛을 발휘하는 사람은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살

아계심을 증명하고, 내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경험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 믿음을 분명히 보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

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말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살이는 쉽지 않을 것이고,

또 쉬워서도 안 됩니다. 어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과격해야 하고

쉴 틈이 없어야 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으로 여러분

을 데려가는 그런 삶이어야 합니다.”

    
• 포도 한 송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분의 시입니다. <포도 한 송이>. 남편을 먼저 보낸

어느 사모님의 시라고도 하는데, 미스바의 포도 한 알이 가볍게 보이지 않

는 이유입니다.

<포도 한 송이>

    
처음부터

이렇게 탐스럽지는 않았겠지

한 여름 뙤약볕에

숨 멎는 고통 붙들고 울어도 보았겠지

    
애초부터

이렇게 먹음직스럽지는 않았겠지

차가운 비바람 맞으며

몸서리치는 고독과 싸워도 보았겠지

    
나서부터

이렇게 깊은 향내 풍기지는 않았겠지

몸 바쳐 뼈를 깎는 아픔

인내로 참아 낼 수 있었던 보람이겠지

    
탐스런 포도 한 송이

달콤한 맛으로

향긋한 내음으로

    
오늘도 말없이 소임을 다 하누나

만인에게 헌신을 다 하는구나

    
나의 생을 뒤돌아본다

포도 같은 삶이었을까

    
/사랑으로 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