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신앙 따라

    
• 네 번째 순례길

지난 주간 교우들과 함께 국내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요즘 해외 성지순

례들 많이 가시지요. 이스라엘, 로마, 이집트, 이스탄불. 수백 수천 년 된 역

사가 있는 성지들입니다. 성경의 사건들이 나오는 곳, 예수님의 흔적이 새겨

져 있는 바로 그 곳,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이겨내며 살아간 자리, 전

세계에 있는 성도들이 그 곳 성지로 찾아 듭니다. 우리도 10여 년 전에 다

녀온 바 있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국내 성지는 초라하지요. 기껏해야 백년 이백년 남짓, 그것도

그때의 자리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유

럽이 기독교 국가들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가 꽃피고 그때 유적들이 고

스란히 보존되어 남아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기독교

문화도 변변치 않아, 그 역사와 흔적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

지에 대한 연구와 개발, 순례의 발걸음과 관심도 부족합니다. 이번 인천 여

정에서도 기독교 백주년 기념탑과 기념교회를 들렀는데, 생각보다 초라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땅에 처음 복음이 들어 왔던 자리, 처음 예배 드렸던

장소인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내 성지순례를 계속해서 다녀오고 있습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서울 강화 강경 그리고 인천을 순례 했습니다. 서울에

서는 연세대학교와 장신대, 정동제일교회와 배재 이화학당을 다녀왔지요. 강

화에서는 갑곶 순교지, 온수리 성공회 성당, 고인돌 유적지를 들렀습니다.

강경에서는 유관순의 매봉교회, 해미 순교지, 6,25때 믿음을 지킨 병촌교회,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진원지 강경성결교회. 그리고 이번에 인천은 처음 선교

사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내린 자리에 백주년 기념탑과 기념교회, 그리고 최

초 감리교회 내리교회와 최초의 조직교회회인 새문안교회를 다녀왔습니다.

    
• 우리 땅에 뿌려진

저는 국내 성지순례도 참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땅에서 있었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내 나라를 위해 순교하신 분들입니다. 너무 먼 나라, 오래 되어

화석화된 사건이 아니고,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시대라 오히려 더 마

음에 와 닿습니다. 저들은 이국만리 조선을 향한 사랑으로 찾아와 끝내 순

교하신 이방 선교사들입니다. 토마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티븐슨. 또한 구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믿음을 지키기 위해 피를 뿌리신 우리 선진들입니다.

주기철 손양원 유관순. 이들은 교회와 복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지신

신앙의 선진들입니다. 나아가,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처음 세워진 교회

들이 있습니다. 새문안교회, 정동제일교회, 내리교회. 강화 온수리 교회. 또

한 구한말로부터 일제시대 6,25에 이르기까지 온갖 핍박과 고초 가운데서도

예배가 올려졌던 그 교회들을 만났습니다. 해미성당, 강경성결교회, 병촌교

회, 매봉교회. 우리가 4번에 걸쳐 순례한 곳들입니다. 이 모두 우리의 영적

유산이요 신앙의 뿌리입니다. 그 뜨거운 신앙과 역사 앞에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여 감사할 뿐입니다.

    
• 인생은 순례길

문제는 성지를 잘 본 후입니다. 돌아서자마자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너는?”

성지에서 은혜를 받고는 돌아서면 이 음성이 항상 제 뒷덜미를 잡았습니다.

“어디가시나?”

“예? 왜 그러세요. 빨리 차이나타운 가서 밥 먹어야 하는데”

그래도 자꾸 뭐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얼른 도망가듯 가는데도 자꾸만

뒤에서 잡아끌며 따라옵니다. 마치 그 옛날 주께서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

냐”(마11:8) 물으시듯.

“최목사, 무엇을 좀 보았니? 너는 뭐할건데? 선진들은 그렇게 순교하며 복

음을 전해 주었는데. 너는 그냥 감사만 하고 돌아설 뿐이니?”

순례자를 pilgrim이라 하지요. 어원이 per-egrinum 인데, “들판을 가로질러
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목적한 바가 있어, 그것을 찾기 위해 바

삐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요. 순례자는 소풍 나온 것이 아니라 목적지에 이

르기까지 ‘거친 들판을 가로질러’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행이나

관광과는 다른, 순례(pilgrimage) 입니다. 이국만리에 와서 복음을 전하던 그

자리에서 나의 사명을 생각합니다. 피 흘려 순교하신 그 자리에서 나의 사

명을 생각합니다. 온갖 핍박과 고초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그 자리에서

나의 사명을 생각합니다. 폐쇄된 교회를 곁에 두고 숨어서 찬송을 불렀던

선진들 앞에서, 나의 사명을 생각합니다.

성지순례를 통해 우리 인생이 순례길 임을 깨닫습니다. 나그네길이나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길이 아닙니다. 본향을 바라보고 목적을 향해 가는 길, 사

명을 감당해야 하는 길입니다.

오늘날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 때처럼 예수 믿는다고 핍박을 받지는 않습니

다. 그렇다고 순교하며 피를 뿌려야 하는 사명이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요.

오늘날의 순교는 빛처럼 소금처럼 사는 것 아닐까? 순교자의 신앙을 따라

복음을 전하며 지역에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려 죽는 것은 아니지만, 주께서 분부하신 대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순교

자적 삶을 사는 일일 것입니다.

    
• 내 마음의 성지

그런 의미에서 내 마음 속 최고의 성지가 두 곳 있습니다. 먼저 저 멀리 이

스라엘에 한 곳,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감람산 안에 주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 마지막 기도하시던 곳이지요. 얼마나 곤고하셨을까? 얼마나 두려우셨을

까? 어떻게 내 뜻을 꺽고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있으셨을까? 골고다 보다

더 힘드셨던 곳, 우리도 모두 그 돌을 부여잡고 울었지요. 겟세마네. 그곳은

내 마음 속에 오래된 성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국내 아주 가까이에 한 곳이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거룩한 성지, 우리 원주영락교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이 곳, 거

룩한 땅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머금고 그 사랑을 나누

는 곳, 성지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위로와 소망을 얻습니다. 이곳에서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갑니다. 이곳에서 훈련받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그

렇게 매일의 삶에서 선한 삶, 순례의 삶을 삽니다.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을 갈망하며 그분을 높이고 찬양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안에 계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뜻

을 따릅니다. 이것이 순례자의 마음이요 순교자의 신앙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 거룩한 삶이 이곳 교회에서 시작됩니다. 이 곳이 거룩한 땅, 성지입니다.

/사랑으로 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