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편지

    
• 가을을 보내며

11월 둘째 주일입니다. 엊그제 입동이었으니 가을로 하면 늦가을입니다. 우

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했었지요. 봄에 파종하고 여름에 무르익어 가을에 수

확을 하고 겨울에 다시 봄을 준비합니다. 우리 민족이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어린 시절, 추위를 많이 타던 저는 봄이 참 좋았습니다. 겨우내 얼어붙은 몸

과 마음이 훈훈한 봄볕에 활짝 열렸습니다. 20,30대 젊을 때는 아무래도 여

름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뜨거운 태양처럼 열정적인 날들, 울창한 숲과 파

도치는 바다가 멋졌습니다. 인생의 중년기를 통과하는 지금은 당연히 가을

입니다. 높고 청명한 하늘, 꽉 찼다가 텅비어가는 들녘, 진한 갈색 톤의 나

뭇잎, 곱게 물이 든 단풍들. 자연이 주는 가을의 단상들입니다. 이것들을 통

해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내 삶을 돌아보는 사색의 계절, 가을입니다.

    
지난 주간, 떠나는 2019년 가을이 아쉬워서 아내와 배론 성지에 가 보았습

니다. 마지막 단풍들이 성지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가을의 그 가득참과 썰

렁함, 떨어져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느껴 보았습니다. 그러고 집

에 돌아오니 집 앞에 은행나무며 단풍나무들이 붉고 노랗게 불타고 있었습

니다. “여보! 우리 집이 제일 멋지네”.

박정현이 소중한 걸 찾아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목 놓아 노래하지요.

‘소중한 건 곁에 있다고’.

예, 이제 끝물이지만 제각각의 색깔로 아름다이 물든 단풍과 발밑에 나뒹구

는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계절, 가을입니다.

    
• 짧아진 하루, 짧아진 시간

그것도 늦가을 11월 중순, 한 해 끝에서 두 번째 달, 어떤 느낌이 드십니

까? 시인 나태주는 11월을 이렇게 읊습니다.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 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절묘하게 표현했지요. 돌아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11월이라. 정류장

에서 기다리는 버스, 벌써 오래 되었는데 오지 않습니다. 계속 기다리기도,

예서 그만 두자니 너무 많이 기다려서 시간이 아깝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

니, 우리 인생이 11월을 닮았습니다. 때론 가던 길 돌아서서 1월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너무 많이 왔고 또 아깝기도 합니다. 11월을

닮은 사람이 있겠다 싶습니다. 가족일 수도, 인연을 맺고 함께 가는 그 어떤

사람 말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 시작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사람, 그

런 사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인은 이렇게 결론 맺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11월의 해가 빠르게 짧아지듯, 인생도 짧아졌습니다. 그러니 미워할 사이가

없습니다. 후회할 시간도 많지 않습니다. 사랑만 해도 부족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하고자 합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뒤돌

아보아 아쉬워하지 말고, 밉다고 다른 사람 보지 말고, 내 곁에 봄 여름 가

을 여기까지 함께 온 그 사람을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 가을 편지

여기까지, 가을이 들려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입니다. 하나님은 때론 자연을

통해, 시를 통해, 어떤 사건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눅12:56

절)보세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감상만 하지 말고,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음성

을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단풍 구경만 가지 말고, ‘야 끝내 준다’ 사진만

찍고 돌아오지 말고, 가서 가을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으

라!

때론 계절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가을 편지>, 사랑하

는 사람에게서 편지를 받듯, 주께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편지가 있습니다. 그

편지로 울렁이는 하루, 깊어가는 가을날이어요.

• 나를 보신다.

주께서 보내 주신 첫 번째 편지 내용은, ‘나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지금 주께서 보고 계시지요. 무엇을? 까마귀를, 백합화를, 들풀을,

참새 다섯 마리를. 어때요, 귀한 존재들입니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새

들입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풀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저들을 보십니다. 그것도 얼마나 자세히 보시는지, 오죽하면

참새가 몇 마리인 것 까지 말씀하셔요. 주님 눈 안에 저들이 들어와 있습니

다. 저들에게 골방도 창고도 없지만 잘 삽니다. 어떻게? 주님이 보셨기 때문

입니다. 주님이 보셨으면 됐습니다. 주님이 기르십니다. 아름답게 입히십니

다.

    
나태주 시인.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입니다. 운전할 줄 몰라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니신다는 선생님, 그래서 ‘나 좀 태워 주세요’가 이름의 이니셜인 선

생님, 교단에 선 지 43년된 어느 날,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을

까 생각하다 이 시를 썼습니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고, 광화문 대형 서점 글판에도 오른 이 시는 외

롭고 상처받은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줍니다. 무엇이든 대충 보면 안 예

쁩니다. 몸매를 본다면야 흘낏 보고 지나치겠지만, 그것으로는 참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오래도록,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뭐가? 풀꽃

이? 예. 그리고 당신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

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오늘 편지의 핵심

은 이것이에요.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28절)“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

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 가을, 붉게 물든 산하를 보면서 이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연만물을 주관하신다, 그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신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너를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께 맡기라’”.

    
• 나는 당신을 봅니다

‘I see you’ 라는 말이 있어요. ‘나는 당신을 봅니다’. 영화 avatar 주제곡

OST이기도 한데요, 사람을 그냥 ‘쳐다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

을 봅니다’. 나아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영화에서 행성 판도

르의 ‘나비족’들은 이 단순한 말로 사랑을 전하지요. 주인공 남자가 사랑하

는 여자에게, I see you. I see me through your eyes. (당신의 눈을 통해

나를 봅니다).

부부가 서로 함께 살고 있지만, I see you? 당신을 보지 않고 삽니다. 봐도

자세히 보지 않습니다. 말씀 준비하다가 아내 얼굴을 언제 봤을까 생각. 그

냥 본 것 말고 자세히, 사랑의 눈빛으로. 까마득해요. 세 아이들 낳을 때 였

던 것 같아요. 그것도 둘째 셋째때는 주일이어서 혼자 낳고 저녁때까지 있

었습니다. 분만실앞에서 기도해 주고 손을 놓고 바라본 얼굴, 그때 얼굴이

기억납니다. 손톱만한 벌레도 무서워하는 천하의 겁쟁이인데, 홀로 힘든 사

선을 넘으러 들어가는 아내, 바라봐 주는 것 외에는 아무 할 것이 없었지요.

그저 “I see you, 당신을 봅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반대로 제가 수술실에 들어갈 때, 서울 <우리들병원> 침대에 눕혀져 엘리베

이터 앞에서 이별합니다. “가족분은 여기서 인사하세요”. 그때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바라본 아내 얼굴이 기억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으

로 하던 말. 아마 I see you 였을 것입니다. “당신을 봅니다. 당신을 사랑합

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부부가 함께 살아도 그렇게 서로를 자세히 보지 못했어

요. 오늘 밤에 해 보려고요. 얼굴을 맞대고 “I see you, 나는 당신을 봅니

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 외로운 인생

살다보면 힘들 때가 많지요. 누군가 기댈 어깨가 필요합니다. 모압땅 나오미

가 그랬지요. 얍복강가 야곱이, 보디발 집에서 요셉이 그랬습니다. 삭개오

가, 베데스다 연못가 38년된 병자가 그랬습니다.

김유미 시인의 <늦가을>이라는 시를 들어 보세요.

산다는 거 /그런 거지 뭐

정 주고 /정 받고

조금씩 /기대고 부벼대다가

때로는 /남인가봐 /착각도 하다가

찬바람 /불어오면

돌려줄 거 /서둘러 /돌려주고

훠이훠이 /홀가분히 /떠나가는 것

산다는 거 /그런 거지 뭐

근데 /그게 /왜 그리 /힘든지 몰라

    
그렇게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도, 살아 있으면 좋은데 하나둘씩 떠나갑니다.

김시종 시인의 <늦가을에>라는 시를 들어 보세요.

잎새가 푸를 때는 /잎이 많을 줄도 몰랐더니

낙엽이 떨어지매 /낙엽이 지천으로 많아라

곁에 있을 때는 /있는 둥 만 둥한 사람도

떠나면 빈 자리는 /메울 수 없이 크나니

   
사람은 외롭습니다. 세상에 나 홀로 살지요. 주님도 때론 외로우셨습니다.

갈릴리에서 기적을 일으키니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지만, 아무도 주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친형제들도 미쳤다고 했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요9:58). 겟세마네 동

산에서 아무도 그 마음을 알아 주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주님은 세상에 혼자이셨습니다. 시인 정호승이 <수선화>에

서 노래하지요. “가끔은 하나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이렇듯 외로

운 인생,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 I see you, 나를 바라봐주는 그 한 사람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행복>

-나태주-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행복>이라는 시인데요, 제가 한 소절 첨가했어요.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예. 행복입니다. 여러분 이 가을, 너무 외로워 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저녁

(황혼)때 돌아갈 집이 있습니다. 영원한 고향, 천국집이지요. 힘들 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도 다 떠나고, 노래 부를 힘도 열정도 다 사라져서 외로

울 때, 그때 기억하세요.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계십

니다.

 /사랑으로 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