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편지(3)

    
• 마지막 남은 감

교회 옆에 감나무가 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탐스런 감을 주렁주렁

맺어 왔지요. 제가 오가면서 그 개수를 세어 놨었어요. 주인이 따로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어느 순간에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가 다 털어 갈 때도 있어

요. 감잎들도 하나 없이 남김없이 다 떨어진 감나무, 그 앙상한 가지 사이로

까치밥처럼 감들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교회 한 바퀴 돌

때마다, 그 감들을 세는 게 일이었습니다. 지난 얼마 전에는 남은 감이 10

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가보니 감이 다 떨어졌어요. 떨어진 게 아니

라, 다 없어졌어요. 바람이? 비가? 그럼 바닥에 떨어진 감이 있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누가 털어간 것입니다. 아무튼, 감이며 잎이며 다 없어 졌습니다.

아, 그 허망함이란.

오해는 마세요. <마지막 잎새> 주인공 존시처럼 그 잎이 다 떨어지면 ‘내

인생은 끝이다’? 아니요. 그 잎이 다 떨어지면, ‘겨울이 오겠군’ 생각했습니

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주간 영하의 날씨 가운데 겨울이 왔습니다. 오늘

이 11월을 보내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 겨울 준비

날씨가 얼마나 추워졌는지 겨울에 깊이 들어선 느낌입니다. 인생에도 봄 여

름 가을 겨울이 있다지요. 씨를 뿌리는 봄과 같은 어린 시절, 쑥쑥 자라서

우람해 지는 여름과 같은 젊은 때,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는 가을과 같은 중

년, 그리고 쉼과 안식을 통해 더 성숙해 지고 이듬해 봄을 준비하는 겨울

같은 인생. 여러분은 지금 어디쯤 가고 계십니까?

어제는 교회 출근하는데 삼광택지를 거쳐 걸어오지 않고, 원주천변을 돌아

서 걸어 왔습니다. 낙엽을 밟고 싶어서요. 발밑에서 바스락대는 소리, 참 정

겹습니다. 걷다보니 또 하나의 은행잎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방하착(放下

著). 땅으로 가고 싶었다는 듯,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삶에는 복종만 있다는

듯.

노란 은행나무 잎을 골라 책갈피에 넣던 시절이 있었지요. 교복을 입고 학

교마크가 새겨진 검은 모자를 쓰고, ‘시몬느 너는 아느냐’ 하며 제법 시인인

듯 세상 고민 다 하며 걸어가던 때도 있었습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이젠

인생의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앞둔 연배가 되었습니다. 윤동주는 그 젊디젊

던 스물 여섯께에, 인생의 가을을 이렇게 준비했다지요.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대답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 나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사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아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해 가꿔 나가겠습니다.

• 낙엽이야기

이때가 되면 다시 새겨 보는 단풍과 낙엽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치악산을

바라보니, 지난달 산꼭대기에서 시작된 단풍이 산 아래에까지 내려오더니,

불어오는 서풍(西風)에 모두 낙엽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말

하자면, 기온 변화에 따른 나뭇잎의 색깔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잎이

수명을 다해서 색깔이 바래져 결국 낙엽이 되는 소멸과정이지요. 한겨울, 추

운 밤을 이겨내기 위해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다 털어내고 내실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나무가 아름다운 단풍이 되고 낙엽이 되어 떨어져야 겨울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야 봄이 되면 다시금 기적 같은 새생명의 순을 틔우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풍은 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 단풍은 죽음의 서곡이 아니라 아름다운 늙음

입니다. 꽃은 아니지만 나무의 절정입니다. 봄에 싹이 나서 여름에 우거지고

가을에 풍성해 지더니, 겨울을 앞두고는 제 몸을 살리기 위해 몸에서 떨어

져 낙엽이 된 것입니다.

    
시인 도종환은 <단풍드는 날>을 이렇게 노래하지요.

    
<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여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 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봄여름을 지나 찬바람이 선선히 불어 오던 가을 어느 날, 나무는 깨달은 것

입니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버려야 할 때, 이별해야 할 때. 자식처럼 키워

왔던 것들, 제 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는 것을. 비워야 채워진다는 것을. 그 이별이 너무나 힘들어 흘리는 눈물일

까? 나무는 붉은 색 노란 색으로 황홀히 불탑니다. 그 이별이 너무나 아파

낙엽에는 모두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상처난 주변이 더욱 짙게 물들어 있

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낙엽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제 몸을

살리기 위해 순응한 것이지요. 낙엽을 밟으며 우수에 젖을 일만은 아닙니다.

자기 할 일을 다하고 떨어진 위대한 피조물이라!

그렇게 순종과 희생으로 늙어 오신 어르신들을 존경합니다. 아름다운 황혼

입니다. 싱싱함을 잃었어도, 몸의 윤기와 색깔을 잃었어도, 조금도 추하지

않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인생의 모든 과정은, 그가 짧든 길든, 부하든 가난

하게 살았든, 건강하든 장애가 있든, 모두가 다 의미있고 아름답습니다.

    
내게도 벗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게도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게도

비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벗어야 새 옷을 입습니다. 버려야 영원한 것을 얻

습니다. 비워야 은혜로 채워집니다. 그때가 인생의 절정, 우리도 가장 아름

다운 것으로 물이 드는 날입니다.

    
/사랑으로 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