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앞에서

• 문이 벽이 되다

지난 주 어느 날, 집에 잠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현관문

이 열리지 않는 거예요. 뭐가 잘못되었는지, 손잡이를 돌려 아무리 밀어도 소

용없습니다. 사람 부르면 돈도 들고 언제 올지도 모르고 해서, 제가 이리저리

해 보는데 움직이지 않아요. 처음 당해 본 일, 정말 답답하데요. 아내와 제가

꼼짝없이 집 안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웬일이래요. 송곳을 문 틈새에 집어넣고 계속해서 쑤시던 중

에 문이 열렸어요. “야호오~ 할렐루야(?)”. 문밖에 나왔더니 공기부터 달라요,

무슨 감옥에서 탈출한 느낌, 자유다.

그런데 잠시 문이 열렸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어요. 문밖에서 어떻게

되나 보려고 문을 닫았는데, 아뿔싸 또다시 안 열려요. 제가 밖에서 온몸으로

당기고 아내가 안에서 온맘다해(?) 밀어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이젠 집 안에

들어갈 수도, 집 안의 아내가 나올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문을 두고 저와 아

내 사이에 벽이 쳐졌습니다. 결국은 안 집사님이 오셔서 오래된 도어락을 교

체하고서야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문이 안 열리니 얼마나 난감한지요. 그때 예배

나 급한 약속이 있었다면? 빨리 문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라도 있었다면? 너무

나 쉽게 열고 닫고 들어가고 나가던 문인데, 순간 오갈 수 없게 하는 벽이 되

었습니다. 예. 문은 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인생의 벽

인생도 그러할까? 문이 열려야 하는데 닫힌 것입니다. 문이 벽이 된 것입니

다. 문이라면 열면 되는데 벽은 열 수 없지요. 집의 문은 사람 부르면 됩니다.

아무리 닫혔다 하더라도 반나절이면 해결됩니다. 그런데 인생의 문이 닫히면?

인생의 벽 앞에 섰다면? ‘벽 앞에서!’

성경에도 벽을 만난 많은 사람이 나오지요. 얍복강가에 야곱, 광야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 여리고 성 앞의 이스라엘,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 죽을 병으로

벽을 향한 히스기야, 풍랑을 만난 제자들, 예수님 비유에 나오는 잃은 양 한

마리까지.

삶에서도 우리는 시시때때로 벽을 만나게 됩니다. 군 생활 하던 강원도 휴전

선에는 굽이굽이 철책선이 이어져 있습니다. 손내밀면 닿을 듯한 북쪽도 삼중

철책을 높이 쳐 놓았지요. 오늘도 울진 삼척에 큰 산불이 났던데요, 해마다 이

때가 되면 비무장지대에도 불이 납니다. 자연발화가 아닌 화공작전입니다.

DMZ 안에 숲이 우거지면 경계가 불편하니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는 것입니

다. 그러면 몇 날이고 산마다 불이 탑니다. 밤에 초소에서 보면 멀리 산등성이

가 일렬로 불이 타오르는 것이 보입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요. 남과 북에 높이

처져 있는 저 장벽을 어찌해야 할까요? 주님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무시지만,

사람은 자꾸만 벽을 치고 삽니다.

벽은 사람 사이에도 있습니다. “목사님, 그 사람은 벽이에요”. 오죽하면 벽창

호라 할까? 마음문이 굳게 닫혀서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벽에 부딪

히기도 하고, 아이들 같으면 공부하다 취업 앞에서 사회의 높은 벽을 실감하

기도 합니다. 꽉 막힌 현실, 벽 같은 문제 앞에 서는 것이지요.

벽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벽은 문이다

벽 앞에서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물론 동서남북 보이는 것은 답답한

현실뿐입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모두가 끝난 것처럼 보

여집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벽을 보

면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바라보고 일어서면 벽이 문이 됩니다.

신앙은 시선의 문제입니다. 벽 앞에서 무엇을 보느냐? 벽을 보느냐 문을 보느

냐? 불뱀을 보느냐 놋뱀을 보느냐? 집어 삼키는 홍해를 보느냐 능력의 지팡이

를 보느냐? 풍랑을 보느냐 예수님을 보느냐? 골고다의 패배만 보느냐 그 너머

에 부활과 승리를 보느냐?

성도는 보이는 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보고 싶은 대로 보아서도 안 돼요.

보아야 할 것을 보아야 합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어떤 이는 ‘벽’으로 보고 어

떤 이는 ‘문’으로 봅니다. 사람은 보는 대로 마음과 생각이 끌립니다. 벽에게

시선을 다 빼앗기면 주저앉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앞섭니다. 죽음 앞에 선 스

데반의 고백이지요. “ ...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

을 보노라”(행7:56). 그는 순교하면서도 천국의 문을 보았습니다.

예레미야서의 이 말씀은 의미 깊습니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렘1:11)

이스라엘에 살구나무는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겨울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나무라 생각했다지요. 당시 이스라엘 앞날

이 겨울나무처럼 어둡습니다. 한겨울, 꽃을 바랄 수 없던 시대였지요. 그러나

겨울 살구나무만 보면 절망이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꽃

이 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살구나무처럼 깨어 계신다, 지켜 보고

계신다. 그러니 이제 곧 꽃이 필 것이라. 그 하나님을 보아라. 겨울이 곧 봄이

되리라. 벽이 곧 문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 벽을 넘어서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사순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저기 주께서 벽을 허물러 오십니다. 미움과 전쟁

의 벽, 절망과 포기의 벽, 고통과 실패의 벽, 죄와 사망의 벽. 벽 앞에서, 벽을

허물고 문을 내시는 십자가 주님을 바라보시길 빕니다. 주님과 함께 담쟁이처

럼 벽을 넘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