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만들기

• 지천명(知天命)은 무슨?

요즘 들어 자꾸 뭘 잊어버립니다. 이름이 입에서만 뱅뱅 돌고, 어떨 땐 저희

집 전화번호도 어리어리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도 좀 그러긴 했지만 이 정

도는 아니었는데 고장나 깜빡대는 가로등이 따로 없습니다.

며칠 전 생소한 전화가 왔었어요. 군대에서 같이 근무한 분인데, 그 분은 제

이름도 알고 그때 일을 세세히 추억하는데 저는 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수화기를 들고 엉거주춤 반가움만 표시하고는 나중에 군대 사진을 들추어 봤

더니 알겠는거에요, 그것도 꽤 친했더라고요.

목양실 문 잠그고 나갔다가 다시 찾으러 들어오는 건 다반사이고, 세 아이들

전화번호를 외우는 건 아예 포기했습니다. 언젠가는 핸펀을 잃어 버렸는데 외

우는 전화번호가 별로 없어 공중전화 앞에서 한참을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열

쇠를 한 쪽 손에 들고 한참을 찾는다든지, 어디 잘 둔다고 깊숙이 두었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기억해 내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뭘 찾는다고 온 방을 뒤집

어 놓을 때면, 애들 말마따나 건망증 정도가 아니라 ‘치매 초기 증세’가 아닌

가 한숨만 나옵니다. 책을 읽을 때도 금방 읽은 내용인데 생소하고, 줄이 쳐져

있는 걸 보니 예전에 읽은 것 같은데 전혀 처음 본 느낌이니 이걸 어쩌나요.

요즘 신종병 중에 디지털 치매가 있다는데요, 핸펀 등의 디지털 기기에 지나

치게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과 계산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병이랍니다. 오갈피,

꿀, 창출, 참깨 좀 먹어야 겠어요. 건망증에 좋다는 음식들이에요. 근데 그런

분들이 꽤 있으신가 봐요. 주부는 건망증 9단이라나요. 어떤 분은 다리미로

얼굴을 데었다잖아요. 다림질 하다 전화가 왔는데 그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요. 지천명(知天命)이라더니 무슨, 내 마음도 잘 모르겠다?

• 기억의 성소

개의 IQ는 어느 정도 될까요? 개의 지능은 생각보다 낮아서 3-4살 정도 수준

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분이 강아지로 검사해 보았답니다. 빨강 그릇에는 좋아

하는 먹이를 담고 파랑 그릇에는 싫어하는 것을 담았습니다. 대여섯 차례 반

복을 하니까 강아지는 파랑 그릇은 외면하고 빨강만 좋아했습니다. 빨강 그릇

에 좋아하는 것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죠. 곧바로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산책하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빨강 그릇과 파랑 그릇을 내 놓았습니다.

그새 다 잊어버렸습니다. 빨강 그릇, 파랑 그릇을 헷갈려 했답니다. 인간에 비

하면 강아지 기억력은 형편없었다는군요.

사람의 기억력은 어떨까요? 헤르만 에빙하우스(Hermann Ebbinghaus)의 망

각곡선에 의하면, 인간은 학습후 10분 후부터 망각이 시작되며, 1시간 뒤에는

50%, 하루가 지나면 70%, 한 달이 지나면 80%를 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기억력이 정말 형편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1달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남아있는 기억 중에 필요하지 않은 기

억들이 20%나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지 말았으면 좋을 것들 그것들이

우리의 의지와 다르게 계속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잊었으면 좋을 것들이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힘들게 합니

다. (에빙하우스, <기억에 관하여> 중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혹시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으실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것을 쉽게 잊

어 버려서 하나님을 답답하게 해 드리고 있지는 않을까? 정작 잊어야 할 것을

기억하고 있는 어리석은 인생은 아닌가?

그래서인가 봐요. 하나님께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기억하라’

고 강권하십니다. 심지어는 (수4장)에 보면 요단을 건너면서 법궤를 맨 제사장

들이 서 있던 강 한가운데에 열두 돌을 세우라 하십니다. 강물을 건너 길갈에

서도 똑같이 돌무덤을 쌓게 하시지요. 강물이 다시 흐르면 아무 표시도 나지

않을 터이지만, 훗날 그 돌들은 후손들에게 조상들이 경험했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상기시킬 '기억의 성소(聖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빛바랜 사진, 빛바랜 이야기

몇 일 전에는 서울 도림교회 청년들이 찾아 왔습니다. 박진희, 이주영, 이지

숙, 전선희, 박찬준... 그때 청년부에서 함께 일했던 전사(?)들인데요, 대부분

십년 만에 보는 얼굴들입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정말 다들 살아 있었습니

다. 결혼해서 애가 셋이나 된 아줌마도 있고, 남편과 함께 온 애엄마에, 누군

뭐라더라? “목사님 같은 청년 찾다 노처녀가 되었다”는.

십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만났으니 우리는 얼마나 늙었을까요. 스무 살이 서른

이 되고 서른이 마흔이 되고, 그리고 마흔이 오십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는 밤늦도록 그때 일들을 끄집어내 되새겼습니다. 서로 가지고 있는 기억의

파편들을 조각 맞춰 보고,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본

것입니다. 강산이 한 번 변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서먹서먹 하지 않고 새로

운 것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저들을 보내고 그때 도림교회에서 마지막으로 썼던 글을 꺼내 읽었습니다. 제

가 서울을 떠나 원주로 올 때가 2003년 12월이었으니, 10년 전 글이지요. 그

땐 눈물로 썼는데 지금은 좀 멋쩍네요.

<아이들이 빛바랜 사진을 물어올 때>

- 2003년 12월 10일(토)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찬 기운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겨울이 춥게 느껴지는 것은.

떠날 날이 정해졌기에 차근차근 짐 정리를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쉽게 정리되지 않은 것이 마음인가 봅니다.

태어나 스무 해를 키워준 고향을 떠나던 날이 엊그제였습니다.

한 손에 담요 한 채, 한 손에 책 보따리를 끼고

동구 밖을 빠져나와 돌아서 보니 거기에는,

가시나무 같은 엄마가 서 계셨습니다.

생면부지 서울로 떠나는 어린 아들을 차마 보내지 못하시던 엄니,

그 얼굴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또 스무 해를 훌쩍 보내고 다시 떠나야 할 시간

이제는 “한 손에 복음 들고, 한 손에 사랑을 담고...”

정들었던 도림동산을 구석구석 돌아보니 거기에는,

함께 이 길을 걸어 왔던 ‘당신’이 있었습니다.

기쁠 때 같이 웃어주고, 힘겨울 때 어깨 잡아주던.

나는 이제 엄마의 고운 자리 한 켠에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그 얼굴들을 담아야 합니다.

흔히 담임목회를 해야 진짜 목회라고 누누이 들어온 바도 있어

이제 시작될 소위 ‘진짜 목회’에 대한 기대도 없는 바는 아닙니다.

이런 저런 목회 계획을 세워야 하는 빠듯함도 있습니다.

새로운 곳에 대한 가슴 떨림도 어느 만큼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직은 그 기대와 계획과 가슴 떨림을 미뤄두고자 합니다.

함께 이 허름한 ‘샘터’를 지켜 온,

함께 그 비를 맞고,

함께 목메인 찬양의 함성되던

사랑하는 당신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당신을 향한 내 마지막 예의입니다.

매 해마다

매 여름마다

매 주일마다

그때 그 모임이

그때 그 만남이

결코 짐 정리하듯 간단히 묻어둘 수 없는

세월 지난다고 쉽게 색깔 발하지 않을

멀리 떠났다고 쉬 마음까지 멀어지지 않을

그 고운 사랑의 얼굴들을

그 뜨거웠던 우리들 이야기를

나는 오늘 마음의 앨범 속에

한 사람 한 사람씩

한 순간 한 순간

곱디곱게 담아 가려 합니다.

훗날,

내 아이들이 커서 이 빛 바랜 사진들을 물을 때

그 사랑의 기운이 남아 있는 데까지

그 때의 기억이 더듬어 지는 데까지

늙은 손가락으로 한 얼굴씩 짚어가며

당신을 설명하려 애 써 보리이다.

고마웠습니다.

그리울 것입니다.

행복하세요.

/사랑으로 샘물

• 오늘의 ‘추억 만들기’

그리고 지금은 여기 원주에서 그 고운 추억을 만들고 있습니다. 훗날 우리들

이 손가락을 짚어 가며 되새길 사진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요? 기억(記憶)은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뿌리와 같습니다. 형제가 귀한 것은

피가 섞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함께 했던 기억 때문 아닐까요? 고향산천이

그리운 것이 그 속에 지난 날의 추억이 서려 있기 때문인 것처럼.

그러고 보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랜 시간 함께 기쁨과 슬픔

을 나누었던 공동체적 기억이 있습니다. 긴 세월이 아니더라도 함께 나누었던

기억이 있기에 든든하게 유지되는 것이지요.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삶 자

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요즘 가장 두려운 병은 알츠하

이머, 치매입니다.

추억 만들기, 일찍 요절한 어느 가수의 노래인데요, 아무도 알지 못하게 고이

간직한 기억이 있는지요? 훗날 함께 나눌 아름다운 추억이 많으신지요? 무엇

보다 하나님과는 어떠십니까? 영적으로 주님과 깊은 사귐의 추억을 만들어 가

고 계신지요? 기억의 저편 너머로 함께 만들어 가는 곱디고운 이야기가 그리

운 날입니다.

/사랑으로 샘물

(2013,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