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의 법(法)’

• 구조의무 위반죄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학생인 형이 10살 정도의 어린 동생을 저수지에 데리고 갔는데 동생이 물

에 빠진 경우, 형이 동생을 쉽게 건져낼 수 있는데도 살의를 가지고 그대로

방치하여 동생이 죽게 되었다면 살인죄가 성립하게 됩니다. 동생의 생명을

구해야 할 의무가 있는 형이 고의로 부작위(不作爲)하여 죽게 된 것으로서,

이를 <부작위범>이라고 합니다.

부작위범은 피해자에게 어떠한 범죄적 결과를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

람에게만 인정되는데, 나이 어린 동생을 데리고 저수지에 온 형은 동생이

저수지에 빠졌을 때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보증인’의 지위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그때 저수지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면, 물에 빠진 동생과 아무 관

련이 없는 타인이라 할지라도 동생을 구하지 않은 경우에 죄를 물을 수 있

을까요?

그 질문에 대답은 ‘예’입니다. 의외인가요?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세계 많은 나라에는 일명 ‘선한 사마리아인 법(The

Good Samaritan Act)’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이 법은 (눅10장) 선한 사마리

아인의 비유에서 유래한 것으로, 누군가가 위험에 빠졌을 때 곁에 사람들이

구조에 나서게 하고, 또한 구조에 나선 선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즉,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이 양심 없는 자들은 벌을 주고, 사마리아인 같

은 이들은 보호함으로써 서로 돕고 사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할 뿐더러, 인간

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법적 장치인 것입니다.

이것을 ‘구조의무 위반죄’, 혹은 ‘구조의무 불이행죄’라 하는데요, 마땅히 해

야 할 일을 안 하거나 남을 도와야 하는데 돕지 않은 사람에게 징역이나 벌

금을 부과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최고 징역 5년에 50만 프랑의

벌금을 선고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

우리나라도 2008년에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면서 선한 사마리아

인의 법 취지를 반영하였는데, 전 프로야구 임수혁 선수가 제대로 된 응급

처치를 받지 못해 식물인간이 된 것이 화두가 되었다고 합니다.

불의의 사고로 응급환자가 발생할 경우, 그 사고현장에 있던 사람이 119에

신고해 주지 않거나,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그 환자를 돌봐 주지 않는다

면 그를 살리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인명구조행위는 관련 법령에 따라 공인자격을 부여받고 있는

의료인이나 구조사들에게만 허용되므로, 일반시민은 인명구조에 임할 수 없

었습니다. 위험성도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한 공공 응급의료시스템의 허점을 메우는 길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법’의 역할이지요. 타인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거나 본 경우, 자신이 크게

위험하지 않는 상황일 때 심폐소생술 등 타인의 위험을 제거해 줄 의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수요전도대 베이스 캠프가 쳐지는 봉산동 동사무소 앞길에 보면,

공중전화 부스 옆에 심폐소생기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벌

어졌을 때 그것으로 환자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겠어요?

지난 1997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교통사고 당시,

사고차량에는 운전사, 다이애나, 그리고 이집트의 큰 재벌의 아들이 타고 있

었습니다. 사고 후 그 아들과 운전사의 가족들이 파파라치 기자들 때문에

사고가 났다고 법원에 고소했을 때, 경찰들은 그 고소한 문제도 수사했지만

파파라치들이 사고현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조했는지의 여부도 수사했

습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파파라치들은 사고 후 차가 뒤집혀 세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그들을 구하기보다는 사진기를 대고 사진을 촬영하는 데에만

전념했다는 것입니다.

2004년 SBS 월화드라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에서는 선한 사마리안 법

이 언급되었습니다.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다가 기도폐쇄로 갑작스럽게 호

흡 곤란을 일으킨 환자를 발견한 의대생 이수인(김태희 분)이, 아직 전문적

인 의술을 환자에게 행하는 것이 불가한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응급시

술을 행하여 징계위원회에 회부됩니다. 이때 법대생 김현우(김래원 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들어서 이수인을 구하는 멋진 장면이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당연히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렇게 하지 않은 것은 바로 태만죄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05년경, 서울의 한 공중전화박스 옆에서 죽은 사람이 보름 가까이

되어서야 경찰에 확인되는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기를 오가며 보았을까요?

•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문제는 우리 신앙인들입니다. 이렇듯 일반 사회에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처벌한다면, 성도들은 더욱 선한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

야 하겠지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관심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

하지 않는 것을 죄라”(약4:17절)고 말합니다.

(눅16장)에 거지 나사로를 돕지 않은 부자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든지 악행을 저질러서가 아닙니다. 오직 집앞에 거지 나

사로를 도울 수 있는데도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25장)에서 예수님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고 가만히 있었던 종에게, ‘악하

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에 해당되는 것

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 즉 보아야 할 것에 눈 감고, 들어야 할 것에 귀

막고, 말해야 할 것에 입 닫고, 행동해야 할 때 하지 않은 죄입니다. 이 죄

악은 훗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 바, 그때는 바로

잡기에 너무 늦었거나 훨씬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끌라망스는 어느 날 세느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다가 다리 위에서 난간에

기대어 슬피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났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여자가 곧 강

물에 뛰어들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순간 여인을 구해 주어야겠다

고 생각하면서도, 뒤에 일어날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이 생각나서 그냥 모른척

하고 지나가 버린다. 그가 다리를 다 건넜을 때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

들이 놀라며 모여드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는 더 빨리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고, 그 사건은 곧 잊혀졌다. 그러나 한참 뒤, 어느 날부터인가 클라망

스는 전락하기 시작한다. 강물 속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20세기 양심 알베르 까뮈(A. Camus) 가 쓴 <전락>(顚落)이라는 소설의 일

부입니다. 당시 법적으로는 자살을 기도하는 여인을 구해 주어야 할 아무런

의무가 끌라망스에게 없었지만, 그의 양심은 여인을 구하라고 명령하고 있

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양심의 명령을 거역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전락하게 된 이유입니다. 전락의 단초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

은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목사로서 가슴이 뜨끔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게 주어진 직분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루하루를 무관심하게 보내면서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사제로서의 부끄러움

이 나라가 온통 혼란합니다. 정치는 늘 그래왔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어둡습니다. 이전 정부는 4대강사업으로 나라를 만신창이

만들더니, 현정부는 북방한계선(NLL) 등을 통해 소모적인 종북몰이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가 점점

심각해져 가고 있는데요, 검찰은 정권에 길들여지는 듯하고 대통령은

책임 없다 모르쇠 한 지 오래입니다.

정의를 외치며 촛불을 들고 있는 가톨릭 신부들, 그리고 땅의 사람들

(Am Ha'arez)의 수없는 외침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먹먹합니다.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제(司祭)로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부끄러움 같은 것인가 봅니다.

속히 그 옛날 아모스 선지자의 선포처럼, “오직 정의가 물같이, 공의

가 강같이"(암5:24절) 흐르는 이 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볼테르(Voltaire)의 말이 다시 가슴을 찌릅니다.

“우리는 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사랑으로 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