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에 할 일

• 한 해의 회한

한 해의 마지막에 섰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목사인지라, 돌아보니 얼렁덜

렁 살아 온 시간의 흔적들마다 회한(悔恨)이 그득합니다.

그때 너무 조급했습니다. 너무 나만 보았습니다. 너무 무심했습니다.

너무 많이 잤고 너무 핸드폰을 많이 만졌고 배만 나왔습니다.

익숙한 자리, 받는 자리만 너무 좋아하고, 불의와 너무 많이 타협했습니다.

때론 너무 외로워하며 너무 자책하고 너무 격려와 칭찬에 인색했습니다.

너무 거칠어 목소리가 크고, 너무 마음이 어두워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너무 상처를 많이 주고 또한 상처를 많이 받아, 영혼이 찢겨 졌습니다.

지구 저편에서 우는 소리에 너무 귀를 막았습니다. 아니 내 앞 집에조차 무

슨 일이 있어 나고 있는지 모른 채, 울타리를 닫고만 살았습니다.

너무 용서하지도 못했고 용서받지도 못했으며, 너무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

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띕니다.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나그네로 살아 온 한 해의 삶이 행복하셨습니까?

더 좋아 지셨습니까? 더 깊어지고 더 넓어 지셨습니까? 더 자유로워지셨습

니까? 더 맑고 청아해 지셨습니까? 올해 표어처럼 예수님을 더 많이 닮으셨

습니까?

세상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바, 점점 더 살기 어려워 졌습니다.

정치는 먹통이고 살림살이는 버겁습니다. 한참 일할 나이의 가장들이 일터에

서 쫓겨나 한숨만 쉬고, 문을 닫는 사업장이 많아졌습니다. 작은 자들의 아

우성은 하늘에 울리지만, 힘깨나 있는 사람들은 귀를 막고 듣지 않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교회 어느 집사님에게 급하게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

이 지금 한참 파업 중인 철도노조에 소속되어 있는데, 벌써 파업 3주째라고.

지금 최후통첩이 내려진 상태이고, 내일(28일)은 총파업까지 있어 염려가 되

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연하라고, 진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기도하겠다고 말씀드리며 전화를 끊었

지만 마음은 한없이 먹먹합니다. 이 추운날씨에 파업을 하고 계시는 분들, 또

할 수 없이 그것을 막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 분들까지, 아무 사고 없이 문제

가 해결되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정말이지 이곳저곳에서 절망과 탄식하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 도행역시

매년 이 맘때가 되면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그 해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사자

성어를 선정 발표합니다. 이번 교수신문에 보니 2013년의 사자성어를 '도행

역시'(倒行逆施)로 선정했습니다. 도행역시는 '사기'(史記) '오자서열전'(伍子

胥列傳)에 등장하는 고사성어로,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추천한 육영수 중앙대 교수(서양사)는 “(올해)...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역사의 수레바퀴를 퇴행적으로 후퇴시키는 정책·인사가 고집되는 것을

염려하고 경계한다”라며 추천 이유를 밝혔다고 합니다. 새 정부의 출범으로

희망을 가졌지만 온통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으로 혼란에 빠졌고, 과거의 군

사정권 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지난 성탄절 오후에는 저희 온 식구들이 <변호인>을 보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일까요, 눈시울이 적셔온 게. 그리곤 어느 새 아내와 함께 엉

엉 울고 있었습니다.

“아빠, 왜 그렇게 울었어?”

“...”

왜 그랬을까? 서럽고 쓰라리던 지난 날들이 있었기에 울었고, 지금도 모양만

바꿔 그런 세상은 계속되고 있기에 운 것은 아닐까!

아, 이 어둠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 온 것일까요?

어느 시인의 탄식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많이 갖고 쓰면 저리 굶주려 쓰

러지고 /나 하나 바로 살면 시든 희망이 살아납니다.”

• 저녁 무렵

그러나 너무 자책만 하지 마십시다. 아무 한 일 없이 허송세월한 것 같고

세상은 변한 것이 하나 없어 보이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 냈고, 하나님

은 여전히 세상을 운행해 가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 희망이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희

망이듯 우리 또한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서로를 용납하고 무엇보다 자기 자

신을 용서 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손짓에

응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듯 주님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

가 주님을 믿듯 주님도 우리를 신뢰하십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 표어처럼,

하나님은 우리로 세상을 복되게 하려 하십니다.

“길을 잃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 이것이 등산의 원리라

하지요. 일 년을 살면서 혹시 길을 잃었다면, 그래서 방황했다면 이제 출발

점이었던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우리 모두 오늘 하나님의 품을 생각합시

다. 그 가슴을 떠나 방황했던 삶을 회개합시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 합시다. 시간의 매듭을 잘 지어야 새

로운 시대를 맞을 수 있습니다. 움켜 쥐고 있는 짐을 단출히 하고 2014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십시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12:1-2절 중에서)

이러한 우리들일진대 도종환의 <저녁무렵>이라는 시는 큰 힘이 됩니다. 성

경시대 ‘저녁 무렵’은 새 날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간이었지요. 그러므로 우

리가 지금 맞고 있는 이 시간은 ‘저녁 무렵’입니다. 주변은 다 어둠으로 들어

차 있는 듯 싶지만, 새 날이 가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저녁 무렵>

-도종환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사랑해야 하는 날들은 있다

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

부둥켜안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끓어오르던 체온을 식히며

고요히 눈 감기 시작하는 저녁 하늘로

쓸쓸히 날아가는 트럼펫 소리

사라진 것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풀이란 풀 다 시들고

잎이란 잎 다 진 뒤에도

떠나야 할 길이 있고

이정표 잃은 뒤에도

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

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거기서부터도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

• 두려워 말라!

어젯밤 전화 주셨던 그 집사님에게, 그리고 오늘 두려운 현장으로 가실 남

편 집사님에게 교황 프란체스코의 성탄절 메시지를 전합니다.  

“어둠의 정신이 세상을 감싸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신 ‘두려

워 말라’는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송년주일, 한 해의 저녁무렵을 맞았습니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잎은 다

졌지만 부둥켜 안고 가야 할 새 길이 있습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다시 시작

해야 할 사랑이 있습니다.

그렇게 걸어 가야 할 2014년 새 날이 저-기 와 있습니다.

/사랑으로 샘물